하이퍼리퀴드: 거래소를 다시 발명한 사람들

하이퍼리퀴드: 거래소를 다시 발명한 사람들

2026년 기준 시총 110억 달러대, perp DEX 시장 점유율 80%, 미국 현물 ETF까지 나온 거래소다. 그런데 그 숫자보다 흥미로운 건 이 거래소가 풀고 있는 문제다 — 빠른 CEX와 자기수탁의 DEX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고 모두가 믿던 trade-off를, 우회하지 않고 정공법으로 깨버렸다. 거래 전용으로 빠른 블록체인을 새로 깔고, 진짜 오더북을 그 위에 올렸다는 이야기다.

핵심은 이 결정이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HFT 트레이딩 펌(Hudson River Trading) 출신의 11명짜리 팀이, VC 한 푼 안 받고, 트레이딩 펌 수익으로 부트스트랩해서 만들었다. 그 결과 토큰 분배도 인사이더 0%, 시장조성자 0%로 가능했고 — 동시에 그 우아한 메커니즘이 위기 때 어떻게 공격면이 되는지(JELLY 사건)와, 그래서 "코드가 규칙"이라는 원칙이 어떻게 사람의 투표로 바뀌었는지까지가 한 묶음이다. 모든 선택이 앞 선택의 한계가 낳은 결과다.

---

1. 거래소가 하는 일은 결국 하나다

주식이든 코인이든, 거래소의 본질은 한 줄이다.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을 연결하는 것. 이 한 줄을 어떻게 푸느냐가 그 뒤의 모든 설계 결정을 끌고 가고, 하이퍼리퀴드가 왜 지금의 모양인지도 여기서부터 풀린다.

이걸 하는 가장 익숙한 방식이 오더북(order book, 호가창)​이다. "$100에 10개 매수"와 "$101에 5개 매도"가 줄을 서고, 가격이 맞으면 체결된다. 증권사 앱의 그 호가창, 바이낸스의 그 화면이다. 누가 이 줄을 관리하나? 중앙의 회사 서버다. 바이낸스·코인베이스 같은 곳을 CEX(Centralized Exchange, 중앙화 거래소)​라고 부른다.

CEX가 빠르고 편한 이유는 이 구조 자체에서 나온다. 회사 서버 한 곳이 모든 호가를 메모리에 들고 있으면, 새 주문이 들어왔을 때 일치하는 반대 호가를 찾는 일은 마이크로초 단위로 끝난다. 1초에 수만 번 호가가 갱신돼도 문제없다.

문제는 그 대가다. 거래소 계정에 코인을 넣으면 실제로 그 코인은 거래소가 들고 있는 거다. 잔고는 회사 데이터베이스에 한 줄 적혀 있을 뿐이고, 회사가 망하거나(FTX 사태가 정확히 이거였다) 출금을 막으면 그 한 줄은 휴지조각이 된다. 빠른 매칭이라는 능력이 "자산을 한 곳에 모은다"는 전제 위에 서 있고, 그 전제가 곧 단일 실패점이 된다. "내 키가 아니면 내 코인이 아니다(not your keys, not your coins)"는 이 동네 격언이 이 단일 실패점을 가리키는 말이다.

---

2. 블록체인이 그 단일 실패점을 해체한다

여기서 블록체인이 등장한다. 거칠게 말하면 블록체인은 누구도 혼자 위조할 수 없는, 모두가 같은 사본을 들고 있는 공개 장부​​다. 은행 서버 한 곳이 잔고를 기록하는 게 아니라, 수천 대의 컴퓨터가 동일한 장부를 공유하면서 서로 검증한다. 한 컴퓨터가 거짓말을 하려 해도 나머지가 다른 사본을 들고 있으니 즉시 들킨다. 그래서 잔고를 "맡길" 필요가 자체가 사라진다 — 내 지갑의 키만 내가 들고 있으면 장부 위의 잔고는 나만 움직일 수 있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간 게 이더리움의 스마트컨트랙트(smart contract)​다. 장부에 잔고만 적는 게 아니라, 일정한 조건이 만족되면 자동으로 돈을 옮기는 프로그램을 장부 위에 올려두고 실행시킨다. 중간에 사람이나 회사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 코드가 곧 규칙​​이고, 그 코드는 누구나 볼 수 있다.

그래서 "온체인(on-chain)"​은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책임 위치의 선언이다. 활동이 블록체인 위에서 공개적으로 자동으로 일어나면 온체인이고, 회사 서버 안에서 비공개로 처리되면 오프체인이다. CEX의 매칭은 오프체인이다. 그 사실 자체가 1번에서 본 단일 실패점이다.

---

3. DEX가 부딪힌 벽

그럼 거래소도 회사 서버 없이, 스마트컨트랙트만으로 돌릴 수 있지 않을까? 이게 DEX(Decentralized Exchange, 탈중앙화 거래소)​다. 내 코인을 회사에 맡기지 않고, 내 지갑에 그대로 둔 채로, 코드와 직접 거래한다. 자기수탁(self-custody)​이 지켜진다.

그런데 여기서 큰 벽에 부딪힌다. 오더북을 블록체인 위에 그대로 올리기가 너무 어렵다는 거다. 이유는 블록체인의 동작 방식에 박혀 있다. 장부에 한 줄 적으려면 수많은 검증자가 그 변경에 합의해야 하고, 그 합의를 부탁한 대가로 가스비를 내야 한다. 한 줄 적는 데 몇 초가 걸리고 몇 센트가 든다.

오더북은 1초에도 수만 건씩 주문이 들어오고 취소되고 갱신되는데, 호가 한 번 올리는 데 몇 초가 걸리고 매번 가스비를 내야 한다면 호가창은 작동 자체가 불가능하다. CEX의 마이크로초 매칭과 블록체인의 초 단위 합의는 단위가 다르다. 1번에서 본 CEX의 빠른 매칭이 "자산을 한 곳에 모은다"는 전제 위에 있었다는 걸 떠올리면, 그 전제를 빼는 순간 속도가 같이 무너진다는 게 자연스럽다. 거래소의 사용성과 자기수탁은 같은 그래프 위의 trade-off였던 셈이다.

---

4. AMM — 오더북을 "포기하는" 우회로

그래서 DeFi 진영이 짜낸 영리한 우회로가 AMM(Automated Market Maker, 자동화된 시장조성자)​이다. 유니스왑이 대표 주자다.

발상의 전환이 핵심이다.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을 직접 매칭하는 걸 포기하자. 대신 거대한 돈 항아리(유동성 풀)를 만들어두고 거기랑 거래하게 하자.

호가창이 "사람 대 사람 중고거래"라면, AMM은 자판기다. 자판기 안에 ETH와 USDC(달러 코인)가 한가득 들어 있다. 내가 USDC를 넣으면 공식에 따라 정해진 양의 ETH가 나온다. 사람 기다릴 필요 없이, 항아리만 충분히 크면 언제든 즉시 거래된다. 가격은 항아리 안의 두 코인 비율로 수학 공식이 자동 결정한다 — 그 유명한 x · y = k다.

ETH 100개와 USDC 200,000이 들어 있다면 곱은 20,000,000으로 고정되고, ETH 가격은 USDC/ETH = 2,000달러로 자동으로 떨어진다. 누가 ETH를 빼가면 x가 줄고 가격이 따라 오르고, USDC를 빼가면 그 반대다. 사람의 결정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 곱이 일정해야 한다는 규칙 하나가 모든 가격을 만든다.

항아리는 누가 채우나? 일반 사용자들이 자기 코인을 예치하고, 대신 거래 수수료를 나눠 받는다. 이들을 유동성 공급자(LP, Liquidity Provider)​라 한다.

AMM은 블록체인의 속도 한계를 우아하게 비껴갔다. 1초에 수만 번 호가를 갱신할 필요 없이, 거래가 일어날 때만 항아리 비율을 한 번 갱신하면 되니까. DeFi가 폭발적으로 큰 게 이 발명 덕이다.

하지만 트레이더 입장에선 불편하다. 자판기 가격은 공식으로 뭉툭하게 정해지니, 호가창처럼 "$100.05에 정확히 걸어두는" 정밀한 지정가가 안 된다. 큰 금액을 거래하면 가격이 불리하게 밀리고(슬리피지), 전문 트레이더가 원하는 레버리지·정교한 청산·복잡한 주문 타입 같은 게 어렵다. 편의를 위해 정밀함을 희생한 구조​​다. 블록체인의 속도 한계를 해결한 게 아니라 비껴간 결과, 트레이더 입장의 정밀함이 같이 사라졌다는 게 정확한 진단이다.

---

5. 하이퍼리퀴드의 질문 — 왜 비껴가야 하는가

이제 무대가 깔렸다. 두 갈래였다.

  • CEX (바이낸스): 빠르고 정밀한 오더북. 단, 내 돈을 회사에 맡겨야 함 (FTX 리스크).
  • DEX-AMM (유니스왑): 자기수탁 OK. 단, 자판기라 트레이더에겐 둔탁함.

하이퍼리퀴드의 질문은 단순했다. "둘 다 가질 순 없나?" 그런데 더 정확히는 질문이 이거였다. AMM이라는 우회로가 필요했던 이유가 "기존 블록체인이 거래소 워크로드를 못 견딘다"였을 뿐이라면, 그 전제를 갈아치우면 되는 것 아닌가.

답은 무식하지만 정공법이었다.

기존 블록체인이 느리면, 거래소 전용으로 빠른 블록체인을 아예 새로 만들면 된다.

이게 자체 L1(Layer 1, 독립 1계층 블록체인)​을 깐 이유다. 남의 블록체인 위에 얹는 게 아니라 고빈도 거래만을 위해 바닥부터 설계했다. 4번에서 본 AMM이라는 우회로의 필요 자체를 없앤 결정이다. 그 결과 perp 시장에서 80% 이상 점유율을 차지하는, 완전 온체인 오더북(CLOB)을 제대로 굴리는 최초의 거래소​​가 됐다.

잠깐 perp(무기한 선물, perpetual futures)​가 뭐냐 — 만기가 없는 레버리지 베팅 상품이다. "ETH가 오를 것 같다"에 10배를 걸고 만기 없이 원할 때까지 들고 있을 수 있다. 크립토 트레이더들이 현물보다 훨씬 많이 거래하는 게 이 perp고, 정밀한 오더북이 가장 필요한 시장이다. 하이퍼리퀴드가 정확히 이 시장을 정조준했다.

---

6. 구조 — 두 개의 방이 한 합의 위에 산다

자체 L1을 만들기로 한 결정에서 두 가지 요구가 따라온다. 거래 자체는 마이크로초처럼 빨라야 하고(5번의 정조준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다른 개발자들이 그 위에 자기 앱을 올릴 수 있어야 한다(거래만 있으면 생태계가 안 큰다). 두 요구가 한 체인에서 다 만족되기 어려워서, 하이퍼리퀴드는 체인을 두 개의 방으로 나누고 같은 합의 아래 묶었다.

6.1 HyperCore — 거래 엔진 그 자체

오더북과 매칭이 일어나는 곳이다. 속도가 생명이라 극단적으로 최적화돼 있다. 같은 검증자들이 공유하는 합의 위에서 모든 주문·체결·청산이 블록 단위로 1블록 만에 확정​​된다. 5번에서 잡은 "진짜 오더북"의 기술적 구현체다.

6.2 HyperEVM — 개발자 놀이터

순수 거래만으론 생태계가 안 큰다는 두 번째 요구가 이 방을 만들었다. 옆방에 다른 개발자들이 자기 앱(스마트컨트랙트)을 올릴 수 있는 공간을 뒀고, EVM​은 이더리움 가상머신과 호환된다는 뜻이라 기존 이더리움 개발자들이 코드를 거의 그대로 가져올 수 있다.

핵심은 같은 합의로 보안이 유지되고, 옆방 개발자가 HyperCore 오더북의 깊은 유동성에 직접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게 별것 아닌 것 같아도 큰일이다 — 보통 DEX 위에 빌드하면 외부 유동성을 따로 끌어와야 하는데, 여기선 진짜 깊은 오더북을 그대로 빌려 쓸 수 있다. "거래 엔진과 앱 생태계가 같은 진실을 본다"는 게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설계의 정체다.

6.3 HyperBFT — 둘을 묶는 합의

두 방을 같은 진실 위에 묶어주는 게 HyperBFT​라는 자체 합의 알고리즘이다. HotStuff​라는 학계 표준 BFT 합의를 기반으로, 거래소 워크로드에 맞춰 새로 짠 것이다.

수치로 보면 성격이 드러난다.

HyperBFT 성능 (2026)
  ──────────────────────────────────────────────
  처리량      최대 200,000 TPS (주문 단위)
  블록 시간   0.07초
  중간값 지연 0.1초
  99분위 지연 0.5초
  finality   1블록(=즉시 확정)

"BFT(Byzantine Fault Tolerance, 비잔틴 장애 허용)"의 뜻은 검증자 일부가 배신해도 시스템이 정상 동작한다​​는 거다. 약 ⅓까지 악의적이어도 네트워크가 망가지지 않는다. 합의 구조는 리더 로테이션 — 매 라운드 한 명의 리더가 블록을 제안하고, 나머지 검증자들이 몇 단계 통신으로 합의에 도달한다. 투표 가중치는 스테이크(예치된 HYPE) 양에 비례​​하며, 사용자들이 검증자에게 위임한 물량까지 포함된다(DPoS, 위임 지분 증명).

쉽게 말해 — 장부를 함께 검증하는 컴퓨터들 중 일부가 거짓말을 해도 전체 진실이 지켜지는 합의 규칙이다. 0.07초마다 한 블록을 찍으면서. 3번에서 본 "초 단위 합의"의 한계가 바로 이 자리에서 갈렸다.

---

7. perp이 만기 없이 현물을 따라가는 법

5번에서 perp가 만기 없는 레버리지 베팅이라고 했는데, 여기엔 자연스럽지 않은 요구가 박혀 있다. 일반 선물은 만기일에 가서 현물 가격으로 정산되니까 그 시점에 두 가격이 강제로 수렴한다. 그런데 만기가 없으면 perp 가격이 현물에서 점점 멀어져버릴 수 있다. 다음 섹션의 HLP 볼트가 왜 위험을 떠안는지를 이해하려면 이 수렴 메커니즘이 먼저 깔려 있어야 한다.

해결책이 펀딩 비율(funding rate)​이라는 압박 장치다. 일정 간격(보통 1~8시간)마다 perp 가격과 현물 가격의 차이를 계산해서, 롱과 숏 사이에 직접 돈을 흐르게 한다. 거래소가 가져가는 게 아니라 트레이더끼리 주고받는다.

방향은 이렇다.

  • perp이 현물보다 비싸면(프리미엄): 롱이 더 비싼 값에 베팅 중이라는 신호. → 롱이 숏에게 펀딩비를 낸다. 롱은 비용이 부담돼 청산하거나 신규 진입을 줄이고, 숏은 받아서 들어와 → perp 가격이 현물 쪽으로 끌려 내려온다.
  • perp이 현물보다 싸면(디스카운트): 반대 방향. 숏이 롱에게 낸다.

수식은 보통 두 조각으로 쪼개진다.

funding rate ≈ premium index + interest rate clamp
                ↑                ↑
                perp이 현물보다    USD/quote 자산의
                얼마나 떨어져      금리 차이를 반영하는
                있는가             작은 보정

여기서 중요한 건 펀딩 비율이 "거래소가 강제로 가격을 조정하는 장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가격을 직접 누르지 않고, 비싼 쪽이 돈을 내게 만들어 시장이 스스로 수렴하게 만든다. 만기 없는 상품을 유지하면서 만기 정산의 효과만 거두는 우아한 메커니즘이다.

---

8. HLP 볼트 — "인사이더 수익"을 일반인에게

여기가 시장 구조 관점에서 제일 흥미로운 부분이다.

CEX에선 시장조성(market making)​청산(liquidation)​에서 나오는 돈을 거래소와 내부 전문 트레이더(인사이더)가 독점한다. 일반 사용자는 손도 못 댄다. 이게 우연이 아니라 구조다 — 깊이 있는 호가를 양쪽에 깔고 강제 청산의 반대편을 즉시 받아낼 자본·기술·접근권을 가진 쪽만 그 자리에 설 수 있으니까.

하이퍼리퀴드는 그 자리를 코드로 대체했다. HLP(Hyperliquidity Provider)​라는 공용 볼트를 만들고, 누구나 USDC를 예치할 수 있게 했다. 볼트는 세 갈래로 돈을 번다.

  1. 시장조성 — 상장된 모든 perp에서 호가를 양쪽에 깔고 스프레드를 먹는다.
  2. 청산 인수 — 누군가 강제 청산당하면 HLP가 반대 포지션을 떠안는다. 청산은 시장가에서 살짝 불리한 가격에 일어나므로, 그 차익이 들어온다 (이걸 "liquidation alpha"​라 부른다).
  3. USDC Earn — 남는 USDC는 안전한 곳에 빌려줘 이자를 받는다.

수익률은 시장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만, 연 15~35% 범위​(월 평균 약 1.75% ≈ 연 20%)로 보고된다. 가끔 거대 청산이 한 번 터지면 단일일 수익이 5%를 넘기도 한다 — 2026년 2월, BTC가 $76,000을 깨면서 7억 달러짜리 롱이 강제 청산됐을 때 HLP가 24시간 만에 약 $15M 수익을 봤다.

AMM의 LP(자판기 채우는 사람)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LP는 단순히 자판기 재고를 대고 가격이 알아서 움직이게 두는 수동적 역할이고, HLP는 능동적인 시장조성·청산 전략을 돌리는 프로 트레이딩 펌처럼 행동하는 볼트​​다. 4번의 자판기가 풀지 못한 정밀한 시장조성의 자리를, 진짜 오더북 위에서 일반인에게 개방한 셈이다. 그 위에 전문 트레이더가 전략 볼트를 만들고 일반인이 따라 예치하는 카피트레이딩 구조​​도 네이티브로 얹혀 있다.

다만 공짜는 아니다. 4일 락업​​이 걸려 있어 마지막 예치 후 4일은 출금이 막힌다. 시장조성 전략이 불리한 타이밍에 자금 이탈로 흔들리는 걸 막는 안전장치다. 그리고 — 10번에서 보겠지만 — 청산 인수라는 수익원이 정확히 같은 메커니즘으로 무기화될 수 있다는 게 이 설계의 어두운 면이다.

---

9. 창업자가 설계를 결정한다

이 설계가 우연이 아니라는 건 창업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제프 얀(Jeff Yan). 2013년 국제물리올림피아드 금메달. 하버드에서 수학·컴퓨터과학. 그리고 초저지연(ultra-low-latency) 전략으로 유명한 HFT 펌 Hudson River Trading(HRT) 출신이다. HFT는 1초에 수천 번 주문을 넣고 빼며 마이크로초 단위로 싸우는 동네다. 6번의 0.07초 블록·즉시 확정에 대한 집착이 어디서 왔는지 바로 보인다 — 거기서 일하던 사람에게 "체결 속도와 결정성"은 협상 대상이 아니라 종교다. 팀에는 Caltech·MIT·Citadel·HRT 출신이 포진해 있다.

운영 방식도 그 정신의 연장이다. 트레이딩 펌 수익으로 자력 개발(부트스트랩)​했고, VC 투자를 거부했으며, 팀을 10명 수준​​으로 유지했다. 얀이 본 VC의 문제는 단순했다 — 큰 지분을 가진 외부 자본은 네트워크의 "흉터"​가 되어 장기적으로 결정을 비뚤어지게 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돈을 위해 한 적이 없다. 트레이딩이 가르쳐주는 건, 돈은 결국 숫자라는 것이다."

토큰 출시도 같은 원칙의 결과물이었다. 2024년 11월 29일​, 전체 공급의 약 31%(약 3억 1천만 개)를 과거 사용자에게 직접 뿌렸다. 사모 투자자 배정 0, 유료 시장조성자 배정 0. FTX 이후 "인사이더가 다 해먹는다"는 불신이 팽배하던 시장에서 이 "노 인사이더" 분배가 그대로 신뢰로 전환됐다. 8번의 HLP가 "프로 시장조성 수익을 일반인에게 연다"였다면, 토큰 분배는 "프로토콜 지분을 일반인에게 연다"는 같은 원칙의 다른 표현인 셈이다.

설계 철학에 자주 등장하는 두 구절.

  • "No internal exchange, no discretionary power." — 내부 특혜 거래 없음, 재량 권한 없음.
  • "Hyperliquid is not a company." — 회사가 아니라 프로토콜이다.

얀 본인은 거의 공개석상에 안 나타난다. 인터뷰 거의 없고, 컨퍼런스 안 돌고, SNS 활동도 최소다. 11명 안팎의 핵심 인력으로 하루 약 100억 달러 거래량​, 57만 명 이상 사용자, 마케팅 예산 0. 6~8번의 설계 결정들이 이 운영 방식 위에서만 가능했다는 게 핵심이다 — VC가 큰 지분을 가졌다면 9번의 31% 에어드랍은 시작도 못 했을 거다.

---

10. 그늘 — JELLY 사건이 드러낸 모순

하지만 이 깨끗한 서사에 가장 큰 금을 낸 사건이 있다. 자기수탁·탈중앙화를 내세웠는데, 정작 위기 때 "중앙에서 끌 수 있다"는 게 드러난 거다. 8번에서 예고한 그 어두운 면이다.

10.1 무슨 일이 벌어졌나

2025년 3월 26일​. 공격자는 약 5분 안에 신규 계좌 3개를 만들었다.

공격 셋업
  ──────────────────────────────────────────────
  계좌 A   롱 ~$2.0M  on JELLY perp
  계좌 B   롱 ~$2.05M on JELLY perp
  계좌 C   숏 ~$4.1M  on JELLY perp  ← 합쳐서 살짝 더 큰 숏

JELLY는 거래량이 거의 없는 작은 밈코인 perp였다. 셋업이 끝나자, 공격자는 여러 외부 거래소에서 JELLY 현물 가격을 펌핑​​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 만에 가격이 400% 넘게 뛰었다.

그러자 공격자의 숏(C 계좌)이 거대한 미실현 손실을 본 상태가 됐다. 손실이 계좌 담보를 넘어서면서 강제 청산이 트리거​​됐다. 정상이라면 청산엔진이 시장에서 반대 포지션으로 숏을 닫아주는데, 오더북에 유동성이 거의 없어서 청산이 실행되지 못했다.

여기서 8번에서 본 설계가 그대로 작동했다 — 그리고 그게 함정의 본체다. 청산이 실패하면 그 포지션을 HLP가 상속​​받는다. 즉, 일반인들이 예치한 약 2억 9천만 달러짜리 볼트가 통째로 거대한 숏을 떠안았고​, JELLY 가격이 계속 오르면 HLP가 끝없이 깎여나가는 그림이었다. 8번에서 본 "liquidation alpha"의 어두운 거울이다. 시스템이 청산 인수로 돈을 버는 구조라면, 그 메커니즘 자체가 공격 표면이 된다.

10.2 어떻게 대응했나

검증자들이 긴급 소집​​돼 약 2분 만에 투표를 마쳤다. 그 결과:

  1. JELLY perp 상장 폐지.
  2. 모든 JELLY 포지션을 공격자에게 불리한 가격(시초가 부근)으로 강제 정산. → 오라클(가격 피드)을 사실상 수동으로 덮어쓴 셈이다.
  3. 공격자로 지목된 주소를 제외한 사용자는 재단이 전액 보상.

자금은 지켜냈다. HLP는 약 $4M PNL 손실에 그쳤고, 공격자도 결국 인출한 $6.26M 중 일부만 챙기고 나머지 자금은 동결됐다.

10.3 그래서 무엇이 드러났나

문제는 이게 의미하는 바다. 검증자 권력이 비상시 정상적인 시장 흐름을 덮어쓸 수 있다는 게 증명됐다. 2번에서 본 "코드가 곧 규칙"이라는 원칙이 위기 때 사람의 투표로 바뀐 셈이다. 가장 깨끗했던 탈중앙화 서사가 바로 거기서 흔들렸다. 시장 조작 공격을 막은 건 코드가 아니라 사람들의 긴급 투표​​였으니까.

검증자가 당시 약 24개로 좁다는 비판이 있었고, 사건 직후 HLP에서 약 $80M가 빠져나갔다​. 신뢰 회복 비용을 본 거다.

이후 하이퍼리퀴드는 하드닝에 들어갔다. 레버리지 한도를 줄여(BTC 최대 40배, ETH 25배) HLP가 청산 포지션을 안전하게 정리할 버퍼를 확보했고, 오라클·청산 메커니즘을 보강했으며, HIP-3​라는 무허가(permissionless) 시장 상장 프레임워크를 도입했다. 누구나 쉽게 시장을 열되, 책임 구조를 명시한다는 결로.

JELLY가 남긴 진짜 교훈은 이거다 — 8번의 HLP는 우아한 메커니즘 디자인이었지만, 동시에 공격면이기도 했다. 우아함과 견고함은 같은 게 아니다.

---

11. 토크노믹스의 진화 — 같은 원칙의 다른 확장 (2025~2026)

JELLY 이후 흐름은 두 갈래로 갈렸다. 한쪽은 위에서 본 리스크 하드닝, 다른 쪽은 8·9번에서 시작된 "수익을 참여자에게 돌린다"는 원칙의 더 깊은 적용이다.

11.1 USDH 발표와 폐기

2025년 9월, 하이퍼리퀴드는 자체 스테이블코인 USDH​를 발표하고 외부 운영사를 검증자 온체인 투표​​로 선정했다. 9번의 "no internal exchange"를 스테이블코인 발행에도 적용한 셈이다. 선정된 곳은 Native Markets — Stripe 산하 Bridge 플랫폼으로 준비금을 관리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2026년 5월, 반전이 왔다. Native Markets가 USDH 브랜드 자산을 Coinbase에 매각​​했고, Coinbase는 USDH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USDC를 하이퍼리퀴드의 기본 견적자산(primary quote asset)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통합 중이다. 자체 스테이블코인을 갖는 것보다, USDC 생태계와 깊게 묶이고 그 USDC 준비금에서 나오는 이자를 가져오는 게 더 큰 그림​​이라고 판단한 거다.

11.2 AQA v2 — 이자를 HYPE 매입에 쓴다

그 판단의 결과물이 Aligned Quote Asset v2(AQA v2) 제안이다. 하이퍼리퀴드에 묶인 USDC 준비금에서 나오는 수익의 최대 90%​가 2026년 10월부터 프로토콜의 Assistance Fund​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Assistance Fund는 오직 HYPE 토큰 매입(buyback)에만 쓰인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사용자들이 거래소에 예치한 USDC가 자고 있던 시간에 이자를 만든다. 그 이자가 HYPE를 시장에서 사들이는 자동 매수 엔진​​으로 흘러들어가, 토큰 공급을 줄이고 가격을 떠받친다. 거래소 매출 + 예치금 이자​​가 둘 다 토큰 가치로 흘러드는 구조다.

이게 8·9번에서 본 "원래 인사이더가 먹던 걸 프로토콜 참여자에게 돌린다"는 같은 원칙의 가장 큰 확장이다. HLP가 시장조성·청산 수익을 일반인에게 열었다면, AQA v2는 거래소 예치금의 이자까지 그 흐름에 합류시켰다.

11.3 ETF, 그리고 상장사 보유

이 흐름은 외부 신뢰로도 전환됐다. 2025년 7월, 나스닥 상장 바이오텍 Sonnet BioTherapeutics가 8억 8천만 달러 규모로 HYPE를 보유하는 법인을 세우고 "Hyperliquid Strategies Inc."로 개명​. 미국 상장사 중 최대 HYPE 보유 법인이 됐다. 2026년 5월, Bitwise가 자체 스테이킹을 포함한 최초의 미국 현물 Hyperliquid ETF(BHYP)​를 출시했다. HYPE는 시총 기준 10위권 암호화폐로, 거래 시작 2년이 안 돼 약 110억 달러대 시총에 도달했다.

---

12. 정리

각 마디가 앞 마디의 한계가 낳은 결과로 따라 나온다.

  • 1. CEX는 빠르고 정밀하다. 단, 자산을 회사가 들고 있는 단일 실패점이 박힌다.
  • 2. 블록체인이 그 단일 실패점을 해체한다 — 잔고는 분산 장부에, 키는 사용자에게.
  • 3. 그런데 오더북을 그대로 온체인에 올리면 합의 비용 때문에 작동 자체가 안 된다.
  • 4. 그 한계를 비껴간 게 AMM(자판기). 대신 트레이더 입장의 정밀함을 잃었다.
  • 5. 하이퍼리퀴드는 우회 대신 거래 전용 고속 L1을 직접 깔아 진짜 오더북을 온체인에 올렸다.
  • 6. 거래 엔진(HyperCore)과 EVM 환경(HyperEVM)을 한 합의(HyperBFT) 아래 묶었다.
  • 7. perp의 만기 부재라는 어색함은 펀딩 비율로 풀었다 — 비싼 쪽이 돈을 내게 만들어 시장이 스스로 수렴.
  • 8. 인사이더가 독점하던 시장조성·청산 수익을 HLP 볼트로 일반인에게 열었다.
  • 9. 이 모든 결정이 VC 흉터 없는 부트스트랩 운영 위에서만 가능했다.
  • 10. JELLY 사건에서 그 우아한 메커니즘이 정확히 공격면이 된다는 게 드러났고, "코드가 규칙"은 위기 때 검증자 투표로 바뀌었다.
  • 11. 그 뒤 흐름은 두 갈래 — 리스크 하드닝, 그리고 예치금 이자까지 HYPE 매입으로 합류시키는 토크노믹스 확장.